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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y on, 대평·남항동_ #2 In

  • 작성자 관리자
  • 작성일 2021-02-17
자막
[자막: 스테이on 대평·남항동, #In 깡깡이마을 사람들] (배경음악)(깡깡이 소리) [자막: Q. 과거의 대평동은 어떤 곳이었나요?] 박영오-대평동마을회 부회장: 우리 대평동은 옛날에는 아주 부유한 동네였지요. 故이상직, 아연판 제조기술자: 그때는 대평동에 다방이 수십 개가 됐고 술집도 많았어요. 너무 경기가 좋다보니까 이영완-대평동마을회 회장: 뭐 수산업 하면 일단 고기 아니겠습니까. 생선이 엄청 많이 잡혀가지고 뭐 길거리 고기상자를 질질 끌고 다닐 정도로 故이상직, 아연판 제조기술자: 왜냐하면 배에서 고기 잡고 팔고 남은 것 대평동 와서 뿌리거든요. 그러면 저녁마다 고기 구워먹고 그때만 해도 동네에 고기가 넘쳐나죠 최경섭-선박전기기술자: 제가 65년에 여기 나왔으니까 몇 년 됐지요. 51년 정도 됐죠. 초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이 직업을 선택해서 지금까지 가지고 있죠.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낸 유일한 업체에요. 우리 전기 업체들이. 철공은 아무나 개업 못합니다. 장비가 많아야 되고 공장이 커야 되고 그런데 우리 전기는 부모로부터 아무런 것도 받지 못하고 오로지 시골에 있는 부모님들 봉양해가면서 자기 사업을 이뤄냈다는 이 자체는 정말로 대단하고 존경할 만합니다. 김동진-대평동마을회 감사: 사실은 대평동은 일제강점기부터 상당히 역사적으로 유수가 깊은 곳이에요. 조선업에서 근대 수리조선소 발상지가 대평동이기 때문에 [자막: Q. 깡깡이는 무슨 뜻인가요?] 김동진: 깡깡이 마을인데 보통 “깡깡이가 뭐꼬?”합니다 오시는 분들은. 깡깡이는 뱃전에 조선소 도크장에 배를 올리면 배의 녹을 터는 소리. 깡깡이 아지매들이 뱃전에서 망치로 녹을 터는 소리가 ‘깡깡’해서 깡깡이마을이 됐는데요. 박기영-대평동마을회 총무: 정말 애환이 담긴 것이 지금 저기 깡깡이 아지매들이 일본 말로는 아시바입니다. 지금은 안전 도구가 많잖아요. 그런데 옛날에는 그런 도구가 없었어요. 안전장치라는 것이 없었고. 저 밧줄 하나만 손으로 잡고 왼손은 밧줄을 잡고 오른손은 망치질 하고 그런 애환을 봤을 때 안타깝죠. 그래서 저거만 보면 제가 좀 가슴이 아픕니다. [자막: STAY IN 대평∙남항동, 깡깡이 마을 사람들] [자막: Q. 사람들이 잘 모르는 깡깡이마을 이야기] 김동진: 대평동 여기 남항동 일대가 매축지라는 것을 아무도 모르고 있어요. 그 부분 하고 또 일제 강점기 때 일본 사람들이 여기서 허비제염소라던지 소금을 만드는 공장이 있었고 소공장도 있었고 [자막: Q. 마을박물관은 어떤 곳인가요?] 박기영: 마을 박물관은 장인들의 손때가 오랫동안 묻은 연장들을 이렇게 진열했는데 이 연장들은 우리가 구입한 것이 아니고 주민들이 기증한 거예요. 이게 뭐 고물상에 가더라도 안받아줄 물건이지만 지금 이런 물건이 애한이 섞인 물건들이에요 연장들이. 여기는 토요일 일요일에 항상 해설사가 계십니다. 연장에 대해서 조금 물어보시고 작품에 대해서도 물어보시면 해설은 다 해드릴 거예요. [자막: Q. 대평동 조선소의 역사] 이영완: 그 대평동에 선박 수리조선소가 최초의 조선소가 옛날 일제강점기 때 다나카 조선소라고 있었습니다. 다나카라는 일본사람이 설립한 회사인데 그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1980-90년도에 정말 우리나라, 대평동의 수산업 최고의 호황기였습니다. 그때는 참 배도 많았고 고기도 많이 잡혔고 박영오: 그런데 그 중반에 선박들이 감소하면서 침체되는 마을이었는데 여기는 조선 1번지가 되다 보니까 역사 공부하러 조선소에 대한 역사 공부하러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 대학생들이 다 옵니다. 학생들이 오면 옛날에 아주 좋은 그때는 못 느껴도 중반에 침체되어 있던 분위기보다는 지금 현재로서는 마을이 많이 살아났다고 보면 됩니다. 안 그러면 젊은 사람들이 찾아오지도 않을 텐데 이거 하는 바람에 젊은 사람들이 참 많이 옵니다. 저번에 심지어 어던 아주머니들이 2분 오셨어요. 그 아주머니들이 유람선 한번 타고 오시더니 “이렇게 좋은 곳은 처음 본다.” 이런 말을 할 때는 우리도 아주 호감을 느낍니다. [자막: Q. 최근 대평동을 보고 드는 생각] 이영완: 새롭지 사람들이 모이니까. 그 사람들이 아니면 길거리에 다니는 사람이 없으니까. 옛날에는 그랬다고. 그렇게 사람들이 많이 걸었다고. 임형욱 선박부품제작기술자: 내가 잠시 한 십년 정도 (대평동을) 떠나있었거든. 대평동이 좀 이래도 다른 데 대한민국 중에서 최고 크거든요 여기가. 인천 가서 일해 봤는데 부산에 대면 턱도 없어요. 부산 영도가 제일 커요 좋고. 좀 대평동이 아쉬워요. 일을 좀 할 수 있는 그런 여건이 좀 더 좋으면 좋을 텐데. 강성현-프로펠러기술자: 오래됐습니다. 여기 대평동에서만 근무한지가 41년. 하다보니까 엄청나게 오래돼 버렸네요. 처음부터 시작해가지고 아직까지 그대로. 한 길만 걸어왔다고 보면 되는 거예요. 프로펠러에 목숨을 걸었다 해도 되고. 앞으로도 이왕 하는 것 같으면 나이만 좀 더 젊었으면 이곳보다도 큰 데에 더 확장을 해가지고 프로펠러 같은 모형도 이 모형에서 다른 모형으로도 바꿔가지고 한번 실험도 해보고 싶고 큰 대형 프로펠러를 한 번 만들어 보고 싶다. 그렇지만 그건 아마 힘들 것 같고. “아 저 배가 내가 수리를 해서 잘 나가고 있다.” 이거로 뭐 만족을 해야죠 뭐 다른 게 있겠습니까. 임성학-용접기술자: 사람이 많이 있으면 금방금방 용접만 하면 되는데 나는 여기 나 혼자뿐이니까. 하나부터 다 해야 되니까 시간이 오래 걸리다보니까 많이 못해요. 이영완: 스웨덴 같은 경우에는 16-20년 전에 말뫼라는 도시가 있었어요. 그 도시의 조선업이 완전히 침체돼서 망해버렸어요. 골리앗 크레인이라고 있습니다. 그걸 현대중공업에서 1달러에 사왔어요. 1달러에 사오면서 말뫼 조선소가 문을 닫으면서 도시재생사업을 했는데 지금 20년이 지난 지금 살기 좋은 세계 최고의 도시가 돼버렸어요. 그렇게 그만큼 번창했어요. 왜 그렇게 만들어졌냐면 젊은 사람들을 유입을 해가지고 대학도 짓고 젊은 사람들이 놀 수 있는 공간 창작 공간 그런 곳을 만들기 때문에, 그렇게 연구를 해서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미래가 있지 특히 수리 조선소는 그렇지 않고는 제 생각입니다. 짧은 생각이지만 그런 생각이 드네요. [자막: Q. 과거 그리고 앞으로의 대평동] 임성학: 10년 뒤에 우리 사장님이 여기를 물려주면 10년 뒤에 이걸 하고 있을 거고, 안 물려주면 촌에 가 있을 거고 그때 돼가지고 종업원 아니면 사장 돼 있겠죠. 이상직: 지금 생각하니까 그때 저녁마다 고기 구워먹고 저녁에 생선 구워먹고 제일 고맙죠. 어쨌든 또 그 당시에 내가 그렇게 마음을 먹고 시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박기영: 좀 다양한 분들이 참여해 가지고 좀 더 동네가 밝아졌으면 좋겠고 임형욱: 어쨌든 여기 영도가 좀 잘 됐으면 좋겠다. 딱 그 마음뿐이에요 박기영: 마을을 위해 열심히. 행복한 마을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마을에 찾아오셔서 마을의 총무님 회장님 그리고 여러분들과 함께 서로서로 소통하며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박영오: 지금 많이 활성화가 되어가는 편입니다. 좋아지고 있습니다. 김동진: 찾아오시길 바랍니다.

※In_대평·남항동 속에서 살아가는 이야기


깡깡이예술마을!


그 속으로 들어가 대평·남항동의 새로운 이야기를 경험하고 살아있는 역사, 수리조선업 종사자들의 이야기를 함께 들어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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